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문단 편집) ==== 인권탄압 ==== > 오늘은 악마들에게 나쁜 날입니다. 왜냐하면 피노체트가 악마들에게서 지옥의 대통령직을 빼앗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 > [[멕시코]]의 소설가 카를로스 푸엔테스(Carlos Fuentes, 1928~2012). 피노체트의 사망 소식을 듣고 >(국가)폭력 면에서 ([[박정희]] 시기 [[대한민국]]과 피노체트 시기 칠레) 두 나라를 비교하면 '''한국은 유치원 수준에 불과했다.''' 한국에서는 미국 신부로서 어느 정도 말을 할 수 있었지만 칠레는 말하는 것조차 위험한 일이었다. >---- >제임스 시노트(James P. Sinnott, 1929~2014) 신부. 2006년 4월 20일에 한국 [[기독교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시노트 신부는 칠레 등 남미 여러 나라에서 반독재 투쟁에 참여한 바가 있다. 참고로 시노트 신부는 박정희 시기 대한민국에서 [[인민혁명당 사건]]의 진상을 밝혔다는 이유로 조지 오글(George E. Ogle, 1929~2020) 신부와 함께 추방된 경험이 있었던 만큼 박정희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라 박정희의 개발독재를 '''"[[나치 독일]]과도 같다"'''고 평했을 정도였는데, 그런 사람마저도 이런 말을 남겼다. 그도 그럴 것이 박정희도 외국인을 대놓고 탄압한 게 전술한 두 신부의 추방과 [[민청학련 사건]] 때 일본인 2명에게 징역 20년형을 선고했다가 일본의 압박 속에 불과 10개월 만에 풀어준 것이 사실상 전부일 정도로 드물었는데, 피노체트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외국인들이 보이면 단순 구금, 고문을 넘어 문자 그대로 '''UN 직원까지''' 닥치는 대로 살해했기 때문이다.] [[https://www.nocutnews.co.kr/news/144700|#]] 피노체트가 집권하는 동안에는 [[군대]]가 [[경찰]] 역할을 대신하고, 경찰도 군대처럼 [[기관총]] 들고 설쳐온 나라 [[칠레]] 역사에서도 그 전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폭압적인 통치가 자행되었다. 당시 자행된 인권탄압이 어느 정도였냐면, [[칠레]] 사람들은 피노체트 정권의 잔혹성에 질려서 '남미의 [[나치]]'라고 불리던 [[호르헤 비델라]] 치하의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갈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비델라 정권은 피노체트 정권보다 집권 기간은 더 짧았던 것과 달리 죽인 사람은 더 많았던 정부였고, 무엇보다도 피노체트와 달리 비델라는 국가를 위한 최소한의 업적도 남기지 않았다. 오히려 아르헨티나 경제난의 최대 원흉으로 꼽히는 인물이 비델라다.] 실제로 대통령 집권 직후인 1975년 3월에는 미국 전문가들이 꼽은 세계 최악의 지도자 3위에 오르기도 했다. [[http://epoque.egloos.com/3579119|참고자료]] [* 참고로 이 조사에서 2위는 [[베트남 공화국]]의 [[응우옌반티에우]] 총통이었고, 1위는 [[우간다]]의 [[이디 아민]] 대통령이었다.] 피노체트는 마르크스주의가 파괴적이고 위선적이며 '사회를 유지해야 하는 도덕 원칙'과 양립할 수 없다고 굳게 믿었고, 이 믿음에 따라 '마르크스주의'를 믿는다고 판단하는 칠레 국민들에게 무자비한 탄압을 퍼붓게 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피노체트가 자행한 행위 역시 '파괴적이고 위선적이며 사회를 유지해야 하는 도덕 원칙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실제로 피노체트가 집권한 17년간 칠레 국민 1,031만 명[* 1973년 기준]~1,334만 명[* 1990년 기준] 중 100만 명이 해외로 도피했고[* 그 중 추방당하거나 정치적 이유로 망명한 사람은 최소 20만 명에 달하며(이들은 여권에도 따로 표식이 있었고 칠레 입국 전에 허가를 받아야만 했다고 한다.) 나머지는 쿠데타 직후와 80년대 중반의 경제 위기로 인한 이민이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칠레 인구 중 '''7.5~9.7%'''가 해외로 도피한 셈이다. 참고로 전란도 없이 피노체트 시기 칠레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수준으로 많은 비율의 국민들이 해외로 도피한 독재국가는 [[프랑수아 뒤발리에]] 시기 [[아이티]](7~8%)와 [[이사이아스 아페웨르키]] 시기 [[에리트레아]](9~12%), [[마시아스 응게마]] 시기 [[적도 기니]](31.3~47%) 정도밖에 없다. 참고로 마시아스 응게마 시기 적도 기니는 비정상적인 수치만 봐도 알 수 있듯 문자 그대로 '''피노체트 시기 칠레도 민주적인 국가로 보이게 만들 정도의 생지옥이었다.'''] 10만여 명이 연행되었으며, 3만 명이 해외로 추방된 데다가 40,000여 명의 사람들이 정치적 이유로 불법으로 구금되며 고문 등의 가혹행위를 당했으며, 사망되거나 실종된 인사는 3,225명에 달한다고 한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이 공식적으로 집계되지 못한 실제 피해자는 훨씬 더 많을 것이다. 피노체트 정권하 사망자 비공식 최대 수치는 15,000명 정도라고 한다.]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7&artid=201206191631411|출처]] 또한 2004년 11월에 작성된 발레히 보고서에 따르면 34,690명의 정치범 중 28,459명이 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했고, 정치범들 중 3,621명이 여성이었지만 이들 중 3,200명이 성폭행을 당했으며, 심지어 18세 미만의 미성년자 정치범도 1,244명(13세 미만의 아동들 176명 포함)이나 있었다고 한다. 거기다가 라틴 아메리카 정신 건강 및 인권 연구소(Latin American Institute on Mental Health and Human Rights)에 따르면 피노체트 집권 16년 동안 약 20만 명의 칠레인이 '극심한 외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 수치는 처형, 고문은 물론 강제 추방과 직계 가족이 구금된 사람까지 포함한 수치이다. 피노체트 정권은 좌파라고 판단한 사람들을 해외까지 쫓아가서 영장 없이 구금하고 잔혹하게 고문한 후 재판 없이 살해했다. 그렇게 좌파정당에 가입한 자들과 많은 지식인들, 예술인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했는데, 그 일례로 아옌데를 지지했던 유명 가수 [[빅토르 하라]]는 쿠데타 직후에 반역자로 몰려 군부에게 끌려간 후 살해되었고,[* 끌려가서 3일 뒤에 산티아고 공동묘지 바깥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손가락이 전부 뭉개졌으며, 잔혹한 고문 흔적과 44발의 총상이 온몸에 남아있었다.] 전립선암 투병중이었던 시인 [[파블로 네루다]][* 칠레 공산당원이었다.]는 쿠데타 직후에 병사들이 집에 침입해 장서가 불태워진 일을 겪은 후, 9월 23일에 병원으로 이송되는 중에 사망했으며, 공식적으로는 병사했다고 알려졌지만 독을 주사받고 죽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게다가 집 미국 워싱턴 DC에 망명해 있던 아옌데 정부의 외무장관인 올란도 레틀리에(Marcos Orlando Letelier del Solar, 1932~1976)는 한술 더 떠 피노체트의 지시를 받은 DINA에 의해 자동차에 설치된 폭탄으로 미국인 여성 조수와 함께 사살되었으며, 쿠데타 직전에 다른 쿠데타를 피노체트와 함께 막았던 카를로스 프랫도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무선 조종되는 자동차 폭탄으로 아내와 같이 사살되었다. 그외에도 해외에서 피노체트의 정적들이 암살당할 뻔하다가 미수에 그치는 일이 부지기수였다. 의회 내 좌파세력을 척결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진 이 조치는, 정당정치의 활성화라는 [[칠레]] 고유의 정치 특성과 배치되는 [[학살]]이었다. 그리고 피노체트는 정적들을 외국까지 쫓아가 사살한 것은 물론, 친아옌데 성향이거나 자신에게 반대하는 칠레인과 협력하는 외국인이 있다면 신부와 언론인, 심지어 후술할 것처럼 '''UN 직원'''이라도 가리지 않고 사살했는데, 이를 위해 비밀경찰들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브라질, 우루과이, 파라과이, 스페인, 포르투갈의 군부 독재자들과 일종의 '국제협력 군경테러조직'을 창설했다. 또한 좌익분자들을 척결한다는 명분으로 이런 국가들 간에 반정부 인사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고 '콘도르 작전'으로 알려진 합동작전을 주도하기도 했다. 이런 국제 협력에는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서독 등의 자본주의 국가들도 참여하였기 때문에 유럽인, 미국인이라도 남미에서 반정부 운동 시 고국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처벌되었다고 하며, 심지어 운 좋게 유럽으로 망명한 남미인들이나 귀국한 미국인, 유럽인들도 본국으로 강제송환되어 처벌되었다. 이는 냉전 분위기 탓에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데다 남미 국가들과의 경제, 외교, 안보협력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탈출을 법으로 금지했기 때문에 탈출 시 발각되면 처벌은 당연했다. 이거 때문에 민주인사들은 공산권으로 망명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것 때문에 분노한 피노체트는 공산권과 관계를 대거 단절해 버렸다. [[파일:external/www.footandball.net/chilestadium.jpg]] 피노체트가 정적들을 감금하고 고문하던 산티아고 월드컵 경기장. [[쿠테타]] 직후부터 약 3개월 동안 칠레에는 엄청난 피바람이 불이닥쳤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칠레 정부 보고서에 기록된 피노체트 정권하의 인권 침해 사례 중 2/3가 1973년 한 해 동안 일어난 일이였을 정도였다고 한다.[* 정확히는 1991년에 작성된 레틱 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칠레에서의 인권탄압 피해자 27,255명 중 약 67% 이상이 1973년 9~12월에, 약 19%는 1974~1977년에, 나머지 13%는 1978~1990년에 인권탄압을 당했다고 한다.] 군정 기간 동안 일어났던 사건 중 가장 악명 높은 사건이 1973년 [[9월 30일]]부터 [[10월 22일]]까지 한 달도 안 되는 기간 동안에는 헬리콥터를 타고 칠레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날아간 칠레 육군 소속의 분대가 전국 각지의 군대에서 구금된 정치범 97명을 처형한 '죽음의 캐러밴(Caravana de la Muerte)' 사건인데, 당시 증언에 따르면 처형된 정치범들의 시체는 '보기 부끄러울 정도'로 심하게 훼손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군정 기간은 공식적으로 '전쟁 상태'처럼 여겨졌다고 한다. 또한 피노체트는 쿠데타 직후 좌익분자 색출을 명목으로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위의 사진에서처럼 대량으로 [[산티아고]] 월드컵 경기장에 감금하고 고문했다. 실제로 쿠데타가 일어난 1973년 9월 11일부터 11월 7일 사이에 수백 명의 외국인(언론인도 포함)까지 포함한 12,000명이 이곳에 감금되었으며 공식 기록으로만 41명, 여러 정황으로 봐서는 수백명이 경기장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때문에 경기장 옆의 마포초 강이 피로 붉게 물들었을 정도였다. 군정 기간 동안 무려 4만 명 정도가 이 경기장에 구금되었으며, 피노체트를 위시한 군정 지도자들은 경기장의 확성기로 수감자들에게 막말을 퍼부었다고 한다. 군정 자체가 끝난 1975년에도 3811명이 이 경기장에 구금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1974년 6월 14일에는 기존의 [[칠레]] 육군 정보부를 개편한 국가정보부(DINA : Dirección de Inteligencia Nacional)가 창설되었는데, DINA는 쥐도 새도 모르게 밤에 급작스럽게 찾아와 사람들을 잡아가서 당시 칠레에서 저승사자와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만약 어느 마을에서 '호세가 사라졌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그 호세는 다음날 고문받은 시체의 몰골로 칠레 앞바다에 떠밀려 오는 경우가 흔했다. DINA는 자신에 반대하는 반정부 조직을 철저히 탄압한 것은 물론 전국 각지에 강제 수용소들을 운영하며 수많은 사람들을 감금, 고문했으며, 망명 온 [[나치]] 전범들을 국가정보국에 등용시켰다. 1975년에는 해외에 있는 반정부 인사를 최소 119명을 납치한 후 살해하는 '콜롬보 작전(Operation Colombo)'을 시행한 후 이들이 해외에서 서로 총격전을 벌이다가 죽었다고 사인을 날조하기도 했다. 이렇게 3년 동안 횡포를 부린 DINA는 1977년 8월 13일에 국가정보센터(CNI)로 대체되었는데, CNI는 DINA보다는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다고 한다. 이후 CNI는 피노체트의 퇴임 직전인 1990년 2월에 해체되었다. 거기다가 피노체트 정권의 시기에는 60년대 중반부터 성행하던 극좌 마르크스주의 게릴라 단체가 더욱 열성적으로 무장 운동을 자행했는데, 피노체트 정권은 이 단체들을 탄압했다. 먼저, 혁명적 좌파 운동(MIR, Movimiento de Izquierda Revolucionaria)[* 1965년에 세워진 단체인데, 이후 여러 유력 군부 인사들을 사살했다. 오늘날에도 칠레의 공산당으로 존속하고 있다.] 한 단체에서만 최소 663명이 사망 혹은 실종되었고, MIR 사무총장 말에 따르면 1500~2000명으로 그 수치를 잡아야 한다고 한다고 하며, 후술할 피노체트 암살 미수 사건을 벌인 마누엘 로드리게스 애국 전선(MRPF,Manuel Rodríguez Patriotic Front)[* 1983년에 칠레 공산당 산하로 세워진 단체다. 이쪽은 피노체트 퇴임 후에도 게릴라 운동을 지속하였으며, 미 국무부와 MI6에게 테러 단체로 규정되고 1999년에 무장 투쟁을 중단하고 지금은 칠레 공산당과 분리되어 정당으로 활동하고 있다.]은 49명의 게릴라가 살해되고 수백 명이 고문당했다. 당시 가장 악명이 높았던 강제 수용소로는 산티아고 인근에 있는 '비야 그리말디(Villa Grimaldi)'였는데, 수용자가 얼마나 많았는지 수용 인원이 한계치를 초과하면 새로 건물을 지을 정도였다고 한다. 죄수들은 무릎을 꿇고 기어 들어가야 할 정도로 좁고 극도로 비위생적인 공간 속에서 수감당했고, 손과 발을 묶어놓은 뒤 트럭으로 이를 깔아뭉게는 등의 엽기적인 가혹행위도 이루어졌으며, 이렇게 1974년부터 1978년까지 4년간 수감자 4500여명 중 최소 226명이 사망했다.[* 오늘날에는 추모 공원으로 전환된 상태다.] 그리고 [[콜로니아]]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한 나치 출신 독일인[* 파울 섀퍼(Paul Schäfer, 1921~2010)라는 인물로, 나치 출신이라고는 하나 2차 대전 당시에는 야전 병원에서 근무하던 [[의무병]]이었기에 전쟁 범죄와는 관련이 없었다. 진짜 문제는 전후에 설교자로 활동하며 '''연쇄 동성 [[아동 성폭행]]'''을 저질렀다는 것인데, 칠레로 도피한 것도 그로 인한 처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다만 섀퍼가 콜로니아에 [[요제프 멩겔레]] 같은 악랄한 나치 전범들을 넣어 보호해줬다는 것과 나치 잔당들의 재산으로 무기를 밀매했다는 것 등을 감안하면 나치에 동조했다고 봐도 별 무리는 없다.]이 자신이 운영하던 [[사이비 종교]] 단체를 피노체트 정권의 정치범 수용소로 내주기도 했다. 피노체트 정권 하의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고문은 잔혹성과 엽기성에서 그 [[우스타샤]]와 [[크메르 루주]]마저 능가할 정도로 인류 역사를 통틀어 그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수준이었는데, 실제로 당시 칠레의 인권탄압 관련 보고서에는 읽는 것만으로도 속이 메스꺼워질 정도로 엽기적인 고문 장면들이 수두룩하게 묘사되어 있다. [* 참고로 이런 고문들은 옆동네인 [[아르헨티나]] 군사정권도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썼는데, 이는 남미 군사정권의 고문기술들이 CIA 요원들이 전수해 준 것이기 때문이었다.] 피노체트의 고문 메커니즘은 잠재적으로 전복적이라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사라지게'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이 적들을 '사라지게' 하는 전술은 집권 초반 4년 동안 매우 활성화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 후에는 첫 4년에 비해서는 '''비교적''' 줄었을 뿐이지, 이때에도 고문은 성행했다. 이런 참혹한 고문 등의 가혹행위로 사망한 시체들은 은폐를 위해 헬리콥터로 이송되어 태평양과 [[안데스 산맥]]의 고지에 버려졌는데, 최소 40여건의 비행으로 400~500여구의 시신이 이렇게 투하당했다. 심지어 1970년대에 산 채로 바다에 투척당한 반정부 인사들은 공식적으로 확인된 것만 120명에 달한다. 이 '죽음의 비행'에는 피노체트의 개인 헬리콥터 조종사도 가담했다고 한다. 피노체트 정권에서 자행된 고문과 가혹행위들은 21세기에도 계속 드러나고 있는데, 피노체트가 죽기 직전이었던 2006년에는 DINA 직원에 의해 정적 암살을 위한 [[사린가스]]와 [[탄저균]] 등의 [[생화학 무기]]를 생산했다는 사실까지 폭로되었는데, 2009년에 나온 자료에 따르면 위 수술 중 패혈성 쇼크로 사망했다고 알려졌던, 아옌데 직전에 '''대통령'''을 역임한 [[에두아르도 프레이 몬탈바]]도 DINA에 의해 독극물로 암살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2013년]]에는 피노체트 정권이 반정부 인사들을 고문하면서 심리적, 육체적 고통을 주기 위해 높은 볼륨의 노래를 수일간 계속 듣게 했다는 조사 결과도 나왔다. 고문 당시 배경음악처럼 쓰인 음악은 [[비틀즈]]의 멤버 [[조지 해리슨]]의 '마이 스위트 로드'와 스페인 출신 가수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노래, 영화 [[시계태엽 오렌지]]의 사운드트랙도 있었으며 [[해리 닐슨]]의 '당신 없이는 못살아'(Without You)와 아일랜드의 싱어송라이터 [[길버트 오설리반]], 영국의 싱어송라이터 [[캣 스티븐스]]의 노래도 들었다고 증언했다. 또한 조사실로 데려가 고문하면서도 노래를 계속했다고 말한 것으로 확인되며 또다른 수감자들은 피노체트 정권이 고문을 하기 전에 고문을 더 잘하라고 음악을 틀었다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 [[http://m.news.naver.com/read.nhn?mode=LSD&mid=sec&sid1=104&oid=001&aid=0006480197|기사]] [[1986년]] [[7월 2일]]에는 산티아고에서 반정부 시위를 벌이고 있던 두 '''10대''' 남녀들을 군인들이 붙잡아서 폭행한 다음 남녀에게 휘발유를 뿌린 뒤 라이터로 그들의 몸에 불을 붙였으며, 끔찍한 화상을 입은 두 사람은 군 트럭으로 짐짝처럼 실려갔고, 군인들은 이들을 산티아고 국제공항 주변에 버린 뒤 달아나는 일까지 있었다. 피해자들은 [[칠레]]에서 태어나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했던 19세의 사진작가 로드리고 드네그리였는데 드네그리는 이 사건 이후 나흘 만에 숨졌다. 또 한 명의 피해자인 18살 소녀 카르멘 퀸타나는 전신에 화상을 입고 수차례 대수술을 받은 뒤 간신히 목숨을 건져 캐나다에 살고 있다고 한다. 이 젊은 남녀에게 저지른 끔찍한 [[백색테러]]는 당시 피노체트 정권의 잔혹성을 전 세계에 알렸으며, 여기에 가담한 군인 7명은 2015년에 유죄가 인정되어 구속되었다. [[http://news.joins.com/article/18300475|기사]] 그리고 피노체트는 아동 빈곤율을 낮춘다는 명목으로 아이들을 강제로 유럽이나 미국 같은 서구 국가에 [[입양]]시켰는데, 실제로 가난한 미혼모들의 자식들이 주된 피해자였다고 한다. 여기에 관련된 아이들은 '침묵의 아이들(Children of Silence)'이라고 불리는데, 강제 입양이 의심되는 아이들은 약 8천 명 정도로 추산되며 이들 중 친부모를 찾은 아이들은 2019년 9월 기준으로 20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https://www.bbc.com/news/world-latin-america-48929112|참고자료]]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